백조의 호수
글쓴이 : 박경식 올린날 : 2002-12-23 14:32;57
"아저씨는 나이가 너무 많아 안돼요."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니, 얼마나 서러운 말인가. 벌써 내 얼굴에서 나이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몹시 서글퍼진다.
하지만 난 용기를 냈다. 그 앞에서 30분을 죽치고 기다린 것이다. 그 사람이 없어지기를 기다리면서. 30분 정도 지나자 문을 지키던 사람은 잠시 사라졌다. 때를 놓칠 세라 용기를 내어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카운터에 앉아있던 사람이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아저씨, 미안한데요, 들어오실 수 없는데요."
나는 '왜요'라고 물어 볼 필요성조차도 잊어버렸다. 거기에 앉아있던 다른 사람들, 그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의 얼굴은 많아야 21~22세 정도였다. 나보고 앉아서 술을 먹으라고 잡아끌어도 마실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전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속으로 '그래, 나도 내 생활을 존중하듯 너희들의 생활을 존중해 주어야 하겠지.' 생각하고 그 집을 나왔다. 이후 난 다시 그런 곳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신문에서만 읽었던 그들만의 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그 후 1년 정도가 지나서 우연히 그런 곳을 다시 찾을 기회가 있었다. 대학교수인 친구가 서울로 올라와 가볍게 술 한잔하고 2차로 갈만한 곳을 물색하고 있었다.
분명 미리 알고 간 것은 아니었다. 강남의 신흥 오렌지족이 모인다는 곳, 압구정동이 성수대교가 붕괴되어 된서리를 맞은 후 야타족이 들끓고 있다는 곳이었다. 실제로 친구는 그런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마땅한 술집이 없을까 하고 찾다보니 옛날에 경험했던 집과 비슷한 곳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역시 문지기가 출입을 제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친구가 집어 주는 돈 몇 푼을 받더니 태도가 달라진다.
"옛날 같으면 못 들어가는데, 특별히 봐드릴게요."
나는 그냥 돌아서려 했는데 친구는 학생들과 몇 번 간 적이 있다면서 용기있게 팔을 잡아끌었다. 술김에 조금은 호기심이 발동되었다. 웨이터가 들어오고 술과 안주가 나왔다. 조그만 양주 하나에 콜라 두 병, 그리고 언제 썰어놓았는지 온통 말라 비틀어진 과일 안주 두 접시가 테이블에 놓여졌다. 과일 안주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삶은 과일이나 다름없었다. 김이 다 빠지고 말라 비틀어진 할머니 과일이었다. 차라리 늙은 호박은 달기라도 하지.

그리고 계산서에는 12만원이 그려져 있었다. 아니 이 술값이 정말일까, 바가지를 씌우는 것일까? 저 새파랗게 젊은 친구들이 이런 거금을 쓰면서 놀고 있다는 것일까? 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부모님에게 받은 용돈일까? 수많은 생각이 황당한 계산서를 앞에 두고 연결되었다.

젊은이들은 당시 내게 낯설던, 랩댄스 가수의 옷과 머리모양을 하고 열심히 춤을 추고 있었다. TV에 나오는 가수의 옷차림과 춤을 흉내내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보다 먼저 그런 모습을 하고 다녔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들의 옷차림이나 모습이 그냥 그대로 현대의 모습이라는 것을 조금씩 인식하면서 그들의 노는 모습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나의 호칭은 '아저씨'에서 '사장님'으로 변했고, 웨이터는 다시 '영화감독'으로 호칭을 바꿔 부르고 있었다. 영화의 '영'자도 모르는 나에게 영화배우나 모델을 꿈꾸는 젊은이들을 발탁할 목적으로 찾아온 영화감독으로 바꿔놓고 파트너를 물색해주는 것이었다.

많은 젊은 여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내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이런 곳에 들어오긴 했지만, 쑥스럽고 겸연쩍어 도저히 그들과 같이 어울릴 자신이 없었다. 같이 온 친구는 나가서 춤을 추자고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중 한 여자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자기 자리로 그냥 돌아갔다. 결국 나는 친구의 손을 잡아끌고 그 자리를 나왔다. 친구에게 핀잔을 들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최성수의 노래 중에 '사랑해. 그 순간만은 진실이었어'하는 가사가 있다. 애 낳은 처녀도 할 말이 있다고, 그들도 비록 오늘 만나 내일 헤어질 망정 그 순간만은 진실이었을 것이다. 신세대의 즉석 사랑은 돈환타입일까, 카사노바 타입일까.


▲ 다음글 : 연산군은 돈환형
▼ 이전글 : 연산군은 돈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