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은 돈환형
글쓴이 : 박경식 올린날 : 2002-12-23 14:37;59
20세 되던 해 연산군은 왕위 즉위식을 가진 후 처음 2~3년은 아주 현명한 임금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러나 점차 변태성이 드러나고 백성들을 경원시하게 되었다. 특히 어머니 윤씨가 사약을 받아 창자가 끊어지고 피를 토하면서 죽은 사연을 알고 난 후부터 연산군은 변해가기 시작한다.

폐비 윤씨는 친정에 살면서 사약을 받게 되었는데, 윤씨의 생모 신씨에게 죽어가며 토한 피를 손수건에 싸서 주면서 원자가 자라서 임금이 되거든 내가 이렇게 죽어간 것을 알려달라고 당부하고 죽는다. 윤비는 임금을 그리워했고 언젠가는 찾아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고 있었지만, 자식이 자신의 한을 풀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렇게 죽어갔다.

이 사실은 어린 왕세자에게 절대적인 함구였다. 이 사실이 발설 될 경우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인수대비의 신신당부로 그런 대로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러다 임금이 신임하던 임사홍이 이 사실을 임금에게 고자질하여 모든 것을 엄숙의, 정숙의가 투기하여 윤비가 죽임을 당한 것으로 밝힌다.

이 말을 들은 연산군은 미친 듯이 노여워하며 곧 궁중으로 돌아 와 엄, 정숙의를 뜰에서 때려죽이고,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엄, 정숙의의 시체를 여러 갈래 찢어서 소금에 절였다가 까마귀와 까치가 뜯어먹도록 내버려두었다. 이를 안 인수대비가 크게 노여워하면서, 아무리 두 숙의가 잘못을 했더라도 선왕이 사랑하던 사람을 그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크게 책망하자 연산군은 도리어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아 쓰러져 죽게 하고, 정숙의의 배다른 두 왕자들을 옥에 가두었다가 처형한다.

평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앓이 하던 연산군은 어머니가 죽을 때 남긴 피묻은 손수건을 보면서 증상이 절정에 달한다. 연산군은 오로지 한 맺힘에 대한 복수심뿐이었다. 연산군은 윤씨가 사약을 받을 때와 폐비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일망타진하고 복수혈전을 시작하게 된다. 연관된 집안의 사돈의 팔촌까지 벌을 받게 하고 처형한다. 또한 그들이 살던 집은 허물어 버리고 그 자리에 표석을 세워 그대로 기록하고, 이미 죽은 자를 다시 참시하는 등 복수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연산군은 한글을 배우는 것을 금지시켰고 한글로 써놓은 책들을 다 불질러 버렸으며, 책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도 벌을 주었다. 그가 왕세자일 때 못마땅하게 여겼던 사람들은 파직, 유배, 사형에 처하고, 등극한 후에도 자기 눈에 거슬리는 모든 사람들은 가차없이 죽여나갔다.

궁 안의 모든 신하에게는 모든 화의 근원은 혓바닥이니 입을 닫고 혓바닥을 깊이 감추면 안심도 되고 가는 곳마다 편안할 것임을 목표로 삼게 하고, 자기한테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처형해 나갔다. 상설대장이나 유학자들이 임금의 하는 일에 대해서 절대로 이러쿵저러쿵 못하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서울을 중심으로 동북 100리 및 서남 100리에 유흥연회를 열기 위한 표를 세워 그 안의 민가를 모두 없애 버리고 왕궁에서 내려다보이는 집들 역시 없앴으며, 오로지 연회의 장소로 삼고 놀고 먹었다. 또 사냥을 갈 때도 즐거움만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연산군 이야기에서 뺄 수 없는 것이 여자인데, 대표적인 여자가 바로 장녹수이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사랑을 듬뿍 받아 후궁에까지 올라갔다. 당시 우리 나라의 절반이 그녀의 것이었을 정도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던 장녹수는 여종이었다. 그녀는 연산군보다도 나이가 많았고 이미 결혼을 한 여자였으며 산전수전 다 겪은 기생신분이었다. 그녀는 영리하고 가무에 능하여 연산군의 사랑을 독차지해 나중에 숙원이라는 벼슬까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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