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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숙인 남자들을 위하여
UCLA에서 늦깎이 학생으로 공부에만 전념하면서 나는 공자님이 '배우고 또 배우니 어찌 아니 기쁠까(學而時習之 不亦說呼)' 라고 하셨던 바로 그 기쁨의 정수를 느낄 수 있었다. 마음껏 공부하고, 특히 남성의학 수술 분야에서 최첨단 지식을 습득하며 직접 수술에 참여한 일은 나에게 두고두고 도움이 되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그런 행운과 행복도 길게 가지는 못하였다.
89년도에 집사람이 아프다는 연락이 왔다. 막상 고국에 돌아와
보니 현실이 많이 변해있었다. 연구원 신분으로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해 비쩍 마른 나를 안타깝게 여긴 친구가 워커힐 야외갈비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자꾸 권했다.
"많이 들어라. 달러 아끼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텐데."
갈비와 냉면을 먹고 나자 후식으로 바나나가 나왔다. 그러나 미국을 다녀온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곳에서 제일 값싸고 흔한 음식이 바로 갈비이고 바나나가 아닌가. 이런 점에서 나는 아주 작은 일이지만 한국과 미국의 생활 관습 속에 숨어있는 이질감을 느끼며 혼자 웃었다. 그런데 나중에 친구가 계산하는 걸 보니까 엄청난 거금을 내고 있었다.
며칠 후 대전에 있는 친구들은 나를 방석집으로 초대하였다. 차린 것도 별로 없었고 먹고 마신 것도 별 거 아닌 것 같았는데, 친구는 30만원이 넘는 돈을 치르고 나오는 게 아닌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자, 내가 미국에 다시 가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면 어렵게 대학교수 자리를 얻어야 할텐데, 대학교수가 되면 뭘 하나. 월급이라야 2백만 원 정도가 고작일텐데, 그런 돈은 이런 친구들이 찾아오면 갈비 몇 번 사 주고 방석집 한 두 번 데리고 가면 날아갈 액수이다. 이런 생각과 함께 몇 년 전 어느 대학 부속병원에서 일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 사립대학은 다른 사립대학과 마찬가지로 재단의 전횡이 심했고, 그의 카리스마가 대학 전체를 휘어잡는 곳이었다. 교수 채용이라든지 병원 운용 문제가 그의 결재 하나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걸 본 나는 몇 차례 불합리한 점을 지적하였다. 예를 들면 객관성이 없는 학점이나 편입생 문제, 특히 돈을 받고 편입생을 입학시키고 자격 미달인 교수를 강단에 세우는 일 등을 불합리하다고 항의한 것이다.이사회는 나를 당장 문제 교수로 지목했다. 왜 남들은 끽소리 안하고 따라오는데, 너만 떠드느냐는 식이었다.
몇 번 찍히고 나니 나는 그 대학병원에서 근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사들이나 동료 교수들마저 나를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로 몰아붙이는 바람에 결국 나는 그 대학병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은 쫓겨난 것이었다.
이런 씁쓸한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걱정이 앞섰다. 다시 대학이나 대학 부속병원에 근무하게 되더라도 찾아오는 친구들에게 밥 한끼를 대접하기도 어렵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진로 문제를 원점에서 다시 생각했다. 결국 지금까지 습득한 기술과 의학 지식을 백분 활용해서 개원의가 되는 길만이 솔직하고 나다운 삶의 길이라고 단정지었다. 나는 결심할 때까지가 문제이지, 일을 한번 정하고 나면 아주 속도감 있게 처리하는 편이다.
나는 그 길로 미국으로 돌아가 짐을 꾸려 미련 없이 돌아왔다. 그리고 고향 대전에 둥지를 틀기로 했다. 친지들을 찾아다니면서 개원에 필요한 돈을 빌렸다.
"십시일반으로 몇 백만 원씩만 도와주십시오. 일이 잘 되면 원금은 갚겠습니다. 그러나 이자는 자신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원금마저 못 갚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돈 몇 백만 원 도둑맞았다 생각하시고 내놓으세요."
이렇게 넉살 좋게 나가자 가까운 친구들과 친척들은 흔쾌히 도와주었다. 역시 고국이 제일이고, 피붙이가 제일이고, 서로 믿고 지내는 친구들이 제일이었다. 만약 내가 합리적인 미국사회에서 그런 식으로 손을 벌리고 다녔다면 나는 영락없이 돈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이고, 누군가에 의해 주립이나 시립 정신과 병동에 실려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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